[전기신문 박진표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 입력 2024.04.05 09:00 호수 4255 지면 6면
뉴노멀에 들어선 대한민국 전력생태계
대한민국 전력생태계는 2022년을 기점으로 뉴노멀(new normal)에 들어섰다. 이것은 비가역적 전환이다. 우리 전력생태계의 정점에 있는 한국전력공사는 국가의 암묵적 보증이 없었다면 재무적으로 독자 생존이 불가능한 상태다. 현행 중앙집중적 시스템 하에서 한전의 재무적 파탄은 전력생태계의 총체적 몰락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글로벌 금융생태계 전체의 운명이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통화정책에 내맡겨졌던 것처럼, 2022년 글로벌 에너지위기 이후 우리 전력생태계 전체의 생사는 우리나라의 재정상태에 내맡겨져 있다. 정부당국과 전력생태계 구성원들 가운데 그저 ‘앞으로는 모든 일이 잘 풀릴 거야’고 자기 주문을 거는 것 외에 합리적 대안을 제시하거나 고민하는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작금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과연 대한민국의 재정 안정성이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깊은 의구심이 든다. 급속한 노령화, 저출산, 연금고갈 같은 중장기적 문제를 논외로 하더라도, 경기침체에 따른 세수 부족, 부동산 PF·가계부채發 금융위기 우려 등 단기간 내에 국가 재정을 급속하게 악화시킬 수 있는 요인들이 비일비재하다. 그럼에도 정치권과 정부당국은 국가 재정을 건전화하기 위한 정책은 도외시한 채 당장 눈앞의 선거에서 표를 얻고자 사업성이 의문시되는 사회기반시설 건설 등 국가 재정의 악화를 가속화하는 각종 포퓰리즘 정책에 몰두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 앞에는 미국중심주의의 확산, 미중 패권 갈등의 고조, 글로벌 무역의 퇴조 등에 따른 글로벌 정치경제질서의 근본적 변화라는 더 큰 위기 요인이 잠복해 있다. 만약 당면한 위기 요인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현실화된다면, 국가 재정의 안정성이 심각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음은 자명하다. 이는 국가가 제공하는 신용보강에 기대어 연명하고 있는 전력공기업들의 조달금리 수준을 크게 높임으로써 다수의 전력생태계 주체들을 연쇄적인 파탄으로 몰고갈 것이다.
전력생태계의 총체적 실패
대한민국 전력생태계의 실패는 비단 잘못된 요금정책에서 비롯된 재무적 실패에 한정되지 않는다. 전력수급기본계획, 전력시장의 보상방식, 송전망, 전력계통, 신기술, 규정과 법제도 등 전력생태계의 여러 측면에서 총체적 실패를 겪고 있다.
(전력수급기본계획의 실패) 우선, 전력수급기본계획 수립 과정에서 전원믹스에 관한 갈등이 심각한 수준으로 고조되고 있다. 이제 전력수급기본계획 수립은 국가 전력수급의 장기적 안정성을 도모하기 위한 합리적 공론의 장이 아니라, 특정 정권이 지지하는 특정 전원의 비중을 늘리고자 하는 당파적 행동이 만연한 정치의 장으로 변질돼 버렸다. 자신이 지지하는 전원은 유토피아적 이상을 달성할 수 있는 지고지선(至高至善)으로 선전하면서, 상대방의 전원은 악당, 적폐 등으로 쉽게 치부해 버린다.
사실 전력수급기본계획 수립과정에서 갈등이 커진 것은 전원믹스 계획과 제한적인 발전사업허가권을 연계시키는 제도적 요인에 기인한다. 과거와 달리 전력생태계의 규모와 복잡성이 훨씬 커지고 민간 자본이 대규모로 투입되고 있으며 전력생태계에 직결되는 글로벌 정치경제적 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자본과 기술, 그리고 권력이 다양하게 분산되면서 어떠한 단일 주체가 전력생태계의 가치관, 즉 경제성, 안정성, 안전성, 친환경성 간의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는 헤게모니를 확보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실행가능성이 의문 시되는 희망사항으로 여겨지는 전원믹스 계획을 만연히 허가권과 연계시킴으로써 발전사업기회를 정부 관리 하의 희소한 자원으로 만드는 것이 전력생태계 내에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권력 투쟁을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전원믹스 계획이 초래하는 비극은 전력생태계 내에서 소모적인 정치적 갈등을 초래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전원믹스 계획의 경직성은 변동성과 불확실성이 높아져가는 전력생태계에 유연성과 회복력을 제공할 수 있는 다양한 자원의 도입을 저해함으로써 전력수급의 안정성을 훼손하고 있다. 전력공급의 경제성·안정성·안전성·친환경성, 전력계통에 대한 영향 등 다양한 요소들을 함께 고려할 것을 요구하는 분별력 있는 목소리는 準정치인들의 고성에 묻혀 버리고 만다.
(전력시장 보상방식의 실패) 그리고, 우리 전력시장 역시 변동비 반영시장(cost-based pool)이라는 태생적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력시장에서의 보상을 결정하는 여러 요소들이 경쟁입찰이 아니라 한국전력거래소 위원회의 결정에 맡겨져 있다. 그 결과 전력시장이 전력수급에 따른 가격 결정 그리고 가격 시그널을 통한 투자 유인 제공이라는 원래의 목적을 구현하지 못한 채 그저 계획경제를 이행하는 하나의 수단처럼 작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전력시장 내에서 전원별 또는 발전사 유형별로 보상 구조와 방식이 상이함은 전력시장의 가격결정원리와 배치되고 나아가 전기사업법 상 근거가 희박함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의문 없이 수용되고 있다. 전기요금 인상요인 억제, 한전 적자 완화 등 국가적 대의를 위한다며 ‘수익규제’라는 명목으로 발전사업자들에게 정당한 보상을 지급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재산권을 희생시키는 것에도 거리낌 없다. 이와 같은 전력시장의 규제기구화는, 전력생태계의 주체들이 급변하는 전력생태계에서 생존하기 위해 환경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메커니즘을 왜곡함으로써 전력생태계의 자생적 진화를 저해한다.
(송전망 확장의 실패) 최근 전력생태계에서 가장 뚜렷하게 인지되고 있는 실패 중 하나는 송전망 확장의 실패다. 정확히는, 송전망 확장 실패 그 자체보다는 명백히 예견된 송전망 확장 실패에 대한 대응 실패라 할 것이다. 밀양 사태 이후 여러 전문가들은 송전망 확장이 예전처럼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거듭 경고하면서, 그에 대한 대책을 수립할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전력당국의 전력수급기본계획 수립 내지 발전사업허가 과정에서 그러한 경고는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고, 근본적 대책 수립과 실행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그 과정에서 송전망 확장의 지연이 충분히 예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발전소 착공 연기 요청 등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조치는 전혀 취해지지 않았다. 그 결과, 비록 최근에 「분산에너지 활성화 특별법」이 제정되고 「전력계통 혁신대책」이 마련되었지만, 국가 송전망 계획에 대한 신뢰에 기반하여 건설된 기존 발전소들을 좌초 위험으로부터 완전히 차단하기에는 많이 늦었고, 그리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관련 당사자들 간의 심각한 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전력계통 운영의 실패) 이제 전력생태계의 실패는 전력계통 운영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송전망 확장의 실패와 더불어 변동성이 높은 재생에너지의 확산이 전력계통 운영의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상황에서 경직적 전원믹스 계획과 전력시장의 유연성 자원에 대한 보상 부족은 그러한 난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을 극도로 제한한다. 실계통 기반 하루 전 시장은 2022년 9월 도입 당시 전력수급과 전력계통 여건을 반영해 발전계획을 수립하고 이에 기반해 시장가격을 결정함으로써 계통안정성 확보와 시장효율성 강화에 기여할 것으로 설명되었지만, 오히려 전력시장과 전력계통 운영의 불투명성과 불공정성을 증가시켰으며 심지어 글로벌 에너지위기 당시 전력거래가격을 크게 상승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현재와 같은 전력거래소의 (구체적 기준을 알 수 없는) 깜깜이 계통운영 하에서 전력시장과 전력계통 운영의 공정성과 투명성은 보장될 수 없으며, 이 역시 전력생태계 주체들 간에 계통제약을 둘러싼 첨예한 갈등을 낳고 있다. 반면에 PJM 등 미국 전력시장의 경우, 전력계통 여건을 전력시장 가격결정에 반영하기 위해 지역별한계가격(LMP; locational marginal price) 제도를 시행하면서, 재무적 송전권(FTR; financial transmission right) 제도를 함께 도입함으로써 전력계통 상황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또한 송전혼잡비용에 의해 발생한 정산잉여금(즉, 발전사업자가 지급받는 LMP와 판매사업자가 지급하는 LMP 간 가격 차이)을 FTR 보유자들에게 정산하는 방식으로 투명성과 공정성을 확보하는 한편 사업자들에게 송전혼잡비용을 상쇄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현재 국내에서 논의 중인 지역별 도매전력가격 제도가 투명하고 공정한 것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전력계통 상황의 투명한 공개와 정산잉여금의 공정한 분배 방안이 함께 마련돼야 할 것이다.
(미래 신기술 도입의 실패) 전력생태계의 실패는 미래 신기술의 도입과 관련해서도 발생하고 있다. 전력생태계에 여러 첨단 기술이 속속 개발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전력산업법제는 포지티브(positive) 규제방식을 채택함에 따라 기본적으로 신기술의 도입에 대해 폐쇄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는 신기술을 실증하거나 신기술 기반 신사업을 영위하는 것을 저지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비록 전기사업법 등의 개정을 통해 전기신사업, 지능형전력망사업, 분산에너지 등 특정한 예외들이 허용되기는 했지만, 이러한 예외들만으로 디지털 융복합, 섹터 커플링 등 무궁무진한 신기술에 기반한 미래 전력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에는 명백한 한계가 존재한다.
(규정과 법제도의 실패) 나아가, 규정과 법제도의 실패 또한 전력생태계 주체들에게 깊은 좌절감을 주고 있다. 전력시장 보상규정의 부재나 불명확성은 전기요금 인상 억제라는 전력당국의 정책적 필요에 따라 발전사업자에게 불리하게 해석되기 일쑤다. 전력거래소가 그저 전기요금 인상 요인을 억제하기 위해 임기응변으로 발전사업자에 대한 보상규정을 개정하는 미봉책을 실시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이 같은 조치들은 사업자들의 우리 전력시장에 대한 예측가능성을 떨어뜨려 장기적으로 우리 전력생태계에 대한 투자를 저해할 것이다. 나아가, 해상풍력 계획입지법 사례와 같이 순전히 여야간 소모적인 정쟁으로 인해 법제도 도입이 지연되거나 좌절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 역시 전력생태계의 혁신적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법제도의 개정이 긴요한 현실을 고려할 때 우려되는 점이다.
전력생태계 실패의 근본 원인은 거버넌스 실패
이상에서 살펴본 전력생태계의 실패는 많은 경우 근본적으로 전력생태계 거버넌스의 실패에 기인한다. 거버넌스 실패는 표면적으로는 전력생태계 내 전력당국의 역할과 전력생태계 주체의 역할이 미래 지향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채 전력당국이 직접 또는 전력거래소를 통해 한전 수직통합체계 시절의 정책실행수단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데에서 비롯된다. 전력생태계 시스템에 대한 전력생태계 주체들의 자주적 의사결정은 제한적이며, 정부당국 혹은 전력거래소와 전력생태계 주체 사이의 대화와 타협은 점점 드물게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전력생태계 거버넌스의 중추적 원리인 공정성과 투명성, 급기야 전문성마저 심각하게 의심받고 있다. 이러한 거버넌스 실패의 심연에는 우리나라에서 전력생태계에 관한 가치관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현상, 아울러 민주주의 정치시스템의 말기적 증상인 포퓰리즘 정치가 확산되는 현상이 존재한다. 만약 전력생태계 거버넌스에 대한 즉각적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 전력생태계는 자본과 기술의 만성적 결핍을 겪으며 몰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출처 : 전기신문(https://www.electimes.com) 2024.04.05.
출처 : 전기신문(https://www.electimes.com)
'에너지 뉴스 > 에너지전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업전환 따른 고용불안... 대응책 논의할 전문위원회 만든다 (0) | 2024.04.17 |
---|---|
脫원전 유턴 예고… 尹정부 '원전 생태계 복원' 제동 걸리나[포스트 총선 한국경제 나침반은] (0) | 2024.04.17 |
"농촌의 에너지 전환 & 22대 기후총선" (0) | 2024.04.04 |
미국 시카고시, 태양광 단지 조성…‘친환경 도시’로 거듭 (0) | 2024.03.29 |
에너지전환과 RE100 위한 총선 공 약 제안 (0) | 2024.02.13 |
댓글